세계금융위기 사례

[Web발신]
1997/12/3 ~ 2001/8/23 대한민국IMF구제금융 요청

1995 ~ 2000 IT 버블, TMT 버블, 인터넷 버블

2000 : 911 테러

2007 : 서브프라임 모기지

1997년 대한민국 imf 금융지원금 요청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1997년 12월 3일 ~ 2001년 8월 23일)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1997년 12월 3일에 이루어졌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 20억 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하였다.[1][2] 외환 위기 속에 대한민국은 외환보유액이 한때 39억 달러까지 급감했지만,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는 면했다.[3][4]
'IMF 경제 위기', 'IMF 외환 위기', 'IMF 환란', 'IMF 관리체제', 'IMF 시대', 'IMF 사태' 등으로 불리나 IMF라는 명칭 자체가 외환 위기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표현이다. 그러나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상징성으로 인해 내용이 압축된 단어로 대한민국 언론 등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태국홍콩말레이시아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 위기'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97년 11월 10일에 이루어진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5]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가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97년 12월 18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여당은 야당에게 패배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고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해서 IMF의 개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대한민국은 IT 산업 장려 정책이나 대기업 간의 사업 교환 및 통폐합으로 경제 재건을 도모했다. 1999년 3월, 정부는 사이버 코리아 21 계획을 발표하며 IT 산업 발전 및 인프라 투자에 힘을 쏟았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6][7]
1998년 12월, IMF 긴급 보관 금융에 18억 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갔다.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 통화 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2001년 8월 23일, 대한민국에 대한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위기 발생 때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장치로서 외환보유액을 꾸준히 늘려왔다. '외환 위기'로 39억 달러까지 떨어졌던 대한민국의 외환보유액은 이듬해인 1998년 말 520억 달러로 증가했고, 2001년 말에는 1028억 달러로 1000억 달러선을 돌파했다. 2001년 8월 23일에는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체제를 졸업했다.[8][9][10]

지급준비정책의 변화

1990년대 들어 금융자유화 진전 및 금융시장 발전으로 공개 시장 조작을 주된 통화정책수단으로 활용함에 따라 지급준비제도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특히 1996년 이후 금융기관의 대외경쟁력 제고와 공정경쟁을 위해 9%를 상회했던 지급준비율을 1~5% 수준까지 대폭 인하함으로써 통화정책 수단으로서 지급준비율의 유용성은 크게 낮아졌다.

외환 보유고 관리의 실패

당시 태국홍콩말레이시아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정상적 경제활동을 위한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종합금융사를 비롯한 국내 금융기업들은 저리의 해외단기채를 얻어 동남아 국가들에 장기채로 빌려주면서 2~3%의 이자 차익을 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동남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로 해외단기채들의 만기가 연장되지 않자 국내 자금을 이용해 이를 상환하고, 결과적으로 국내자금이 유출되었다.[14]
마치 기업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외환보유고가 감소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의 위기를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신용도가 하향 조정되었고 원화가치의 환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등 연쇄적으로 국제적 경제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대출

김영삼 정부와 여당인 신한국당의 정경유착으로 인해 한보와 기아자동차에 불법적인 은행대출을 용인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이 한보철강으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뇌물을 받아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와 같은 불법대출로 인해 두 업체의 부도로 각각 5조 원과 10조 원의 부실 채권이 발생했고 이는 국가신인도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15] 재계10권 밖의 한보는 부도처리하면서 엄청난 부실기업으로 당장 부도처리해야할 재계4위의 기아그룹을 선거로 인해 제때 부도처리하지 못한 것이 대외신인도 하락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기아그룹은 지배주주가 없는 전문경영인체제의 기업으로 호남출신의 김선홍이 회장이었다. 당시 기아본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앞에 위치해 있었는데 김대중은 6번이나 찾아가 회생을 약속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 특수강 등 다른 분야는 부도처리되었으나 자동차는 현대그룹으로 넘겨 살아나게 했다.

환율 운용 정책 실패

1997년 말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외국 투자기관들은 한국의 경제도 곧 어려워질 거라 판단하여 투자자금을 대규모로 회수해갔다. 또한 정부는 1997년 9월 이후 계속된 외환시장 불안정 속에서 원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환율 방어를 시작하였고 이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서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기가 돌아오는 국외 차입금의 규모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외환지급불능사태가 초래하기 직전까지 몰리는 외환위기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금융기관의 부실

1996년까지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었고 이후 30개로 늘어나서 해외업무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외채를 끌어와서 어음교환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업이 부도를 일으키게 되자 외채를 끌어서 어음할인한 이들 종금사(종합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고 특히 한보와 기아의 12조 원 가량의 대형 부도사태는 위기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998년 6월 29일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등 5개 퇴출은행를 발표하고,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관치 금융의 그늘아래에서 부실한 경영을 하였으며 이들에게 연관된 작은 관련기업들도 연달아 도산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998년 8월 11일 고려, 국제, 태양, BYC등 부실한 4개 생명보험사가 영업정지를 발표하고, 각각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허술한 관치금융체제, 무능한 정부의 예산 낭비, 대기업들의 분식회계와 과도한 차입 부실 경영 그리고 당시 사회전체에 만연된 경제적 무능력과 부패, 책임의식 실종에 의한 결과였다.

대외 금융세력의 공격

국가개입 위주였던 아시아 국가들이 개방시장 정책을 시작했지만, 외환관리 능력과 외환보유량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대외 금융세력의 공격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고정환율을 쓰던 태국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외환을 견디지 못해 변동환율로 선회한 것에 아시아 각국의 외국자본들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던 퀀텀펀드를 비롯한 규모가 큰 국제금융세력들이 1990년대에 이미 독일, 영국, 멕시코 등지에서 여러 차례 감행했던 수법대로 약속한 듯이 동시에 단기 투자금을 회수해 빠져나가면서 선물환거래를 이용한 주식대량매도와 환투기 공격 등을 감행하여 동아시아 전반에 중앙은행의 외환보유량을 고갈시키고 그 후 달러 구제금융 요청을 받은 IMF가 제시한 가혹한 구조조정 조건을 통해 부실기업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기업까지 무너뜨려 헐값에 재인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투기 세력들의 공격과는 별도로 그 무렵 미국 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주목되는데,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INR은 한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훨씬 전인 1997년 초부터 한보사태 등 한국의 경제 동향을 유심히 관찰해왔고, 주한 미 대사관은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1997년 12월부터 아예 'IMF 데일리'라는 제목의 일일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으로 전송했는데 1998년 2월 미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에 담긴 98년도 한국 관련 최우선 정책목표에는 한국이 금융위기를 헤쳐나가도록 돕는 동시에 IMF와 미국에 대한 의무를 완전히 준수하도록 확실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었는바, 당시 한국은 IMF 협약뿐 아니라 미국에 정리해고제 도입과 적대적 M&A 허용도 약속한 상태였고, 또한 IMF 처방의 효과로 1998년 하반기에는 미국이 한국과의 시장개방협상에서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기까지 하다. 특히 미국정부는 한국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면서, 외환위기의 원인과 관련해 이른바 내인론에 한국 여론이 쏠리는 것을 반기는 입장이었고 이는 한국민들로 하여금 당시 동아시아 전체 외환금융시장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는 당시 집권정부의 정책 실패와 무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오래도록 각인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면이 있다.

1998년 경상수지는 환율의 급등과 내수의 위축으로 수입이 크게 위축되고 반면 수출은 크게 절하된 원화가치로 가격경쟁력이 제고되어 높은 수준의 증가율을 보였다. 또한 여행지출의 감소 등으로 무역외수지의 적자폭도 많이 줄었다. 1999년 11월까지 수출 누계는 1,288억 8,000만 달러, 수입 누계는 1,071억 2,000만 달러로 무역흑자 누계는 217억 6,000만 달러로 연간 목표치 250억 달러의 87.1%에 달하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12월에는 수출이 11월보다 7억 - 8억 달러 늘기 때문에 수입만 현 수준을 유지하면 목표 달성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대략 245억 달러 안팎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경상수지의 흑자추세는 2000년까지도 지속되어 100 - 150억 달러 내외의 흑자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16].

수출전망

1997년 중 수출은 수출단가의 지속적 하락에도 불구하고 수출물량의 꾸준한 증가에 힘입어 금액기준으로 1996년보다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상반기 중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하기도 했던 통관기준 수출은 3/4분기 중에는 두 자리대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물량 측면에서 보면 1/4분기 중에도 16.8%나 증가했고 3/4분기 중에는 36%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4/4분기 들어서도 동남 아시아의 통화위기로 이들 지역에 대한 수출이 차질을 빚으면서 수출증가세가 다시 한 자리대로 둔화되었지만 수출물량은 여전히 20% 이상의 증가세를 보였다. 이처럼 수출물량 증가원인은 원화절하로 인한 국내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 제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화절하는 수출단가 하락을 더욱 부채질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달러화 표시 수출단가가 하락하더라도 원화표시 수출단가의 하락폭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급격하게 진행된 원화가치의 하락에 힘입어 1998년에도 수출은 호조를 보였다. 1998년중 원/달러 환율은 1997년에 비해 연평균으로 40% 이상 높아졌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가격경쟁력 제고 효과는 매우 컸다. 뿐만 아니라 내수경기의 위축으로 판매난에 직면한 기업들이 수출확대에 총력을 기울인 점도 인정된다. 극심한 외환부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1998년 하반기부터 원화가 절상추세로 반전되어 상반기에 비해 수출의 가격경쟁력 제고 효과가 많이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통화위기의 여파가 거의 해소될 것으로 보이는 2000년에는 각국의 경기가 본격적인 회복국면에 접어들면서 수출증가율도 다소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설비투자의 부진으로 생산능력의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원화의 절상추세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수출단가가 상승세로 반전되기는 힘들어 수출증가율이 두 자리대까지 높아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16]

수입전망

경기침체와 원화절하로 1997년 중 수입은 빠른 속도로 둔화되었다. 원화절하로 수입품의 가격이 비싸지면서 국산품으로의 대체가 늘고 있는데다 설비투자의 부진에 따른 자본재 수입의 감소에 힘입어 하반기 들어서는 수입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더구나 수출단가 못지않게 수입단가도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어 수입의 감소폭을 더욱 크게 하고 있다. 곡물과 원유 등 국제원자재 가격이 약세를 보이고 있는데다 엔화 가치 하락과 경기침체에 따른 일본의 물량공세로 자본재의 수입단가도 큰 폭의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수입의 감소 추세는 1998년중에도 지속되었다. 곡물, 원유 등의 원자재 수입은 대체가 힘들기 때문에 크게 줄지 않았지만 자본재 수입은 설비투자가 크게 위축되면서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소비재 수입의 경우도 그동안 높은 증가세를 보이던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이 대폭 줄어들고 원화절하로 수입품의 가격이 비싸져 사치품이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국산품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수입선다변화 해제 등 시장개방이 확대됨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는 소비자의 구매력 감소로 소비재 수입이 크게 늘지 않았다. 1999년부터 경기가 다소 회복세로 반전되고 특히 소비와 투자 등 내수경기가 증가세로 돌아서면서 수입도 많이 늘었다. 내수경기가 본격적으로 살아나는 2000년부터는 더욱 늘어 통관기준 수입증가율이 1999년 5.7%에서 2000년에는 9.5%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16]

경상수지

1996년 중 237억 달러를 기록했던 경상수지 적자는 1997년 1/4분기 중 74억 달러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2/4분기 이후 수입이 크게 줄어들면서 적자폭도 감소했다. 11월부터는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어 연간으로는 1996년의 절반 수준인 109억 달러의 적자에 머물렀다. 경상수지 적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적자 개선에 걸림돌로 작용하던 무역외수지 적자도 4/4분기 이후 크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경상수지의 개선 추세는 1998년 중에도 이어져 연간으로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다. 무역외수지의 적자는 지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무역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실현하면서 경상수지의 흑자반전을 주도한 것이다. 원화절하에 따른 수출호조와 내수경기 침체에 따른 수입감소로 1998년 무역수지는 예상을 깨고 400억 달러, 1999년 230억 달러가 넘는 흑자를 기록하면서 경상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산자부는 수출이 7 - 8% 늘고 수입이 7 - 18% 늘 것으로 가정해 2000년도 무역수지 흑자규모는 100억 - 150억 달러로 축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수출증가율 7%, 수입증가율 18%, 무역흑자 125억 달러로 예측했으며, 현대경제연구원은 수출증가율 6.6%, 수입증가율 18.2%, 무역흑자 97억 달러로 내다봤다. LG경제연구원은 수출증가율 13.3%, 수입증가율 24.6%, 무역흑자 135억 달러로 전망했다. 1998년을 고비로 경기가 회복되고 환율 여건이 호전되면서 해외여행 수요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경상수지 흑자로 외채규모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 자본시장의 개방과 대외신인도 하락효과가 지속되면서 투자는 예상보다 많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16]

2000년 한국경제 전망

민간연구소 2000년 경제 전망 [17] (단위:%)
구 분
삼성
현대
LG
대우
한경연
경 제 성 장 률
민 간 소 비 증 가 율
건 설 투 자 증 가 율
설 비 투 자 증 가 율
경 상 수 지 흑 자(억달러)
소 비 자 물 가 상 승 률
실 업 률
6.5
5.7
8.5
10.9
101
3.2
5.8
5.9
6.5
7.7
17.8
87
4.0
5.4
6.7
5.8
9.2
11.0
107
3.5
5.3
5.0
4.9
10.2
8.9
97
2.7

6.4
7.0
3.6
12.9
92
3.9

국제통화기금(IMF)과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성장률 8~9%,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 이내,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6% 내외(약 250억 달러)에 이른다는 거시지표 전망에 합의했다. 또 2000년에는 경제성장률 5~6%, 물가 3%, 경상수지 흑자 100~150억 달러 등의 전망치에 의견일치를 이뤘다. 이와함께 현재의 경기 상태는 과열이 아니며 내년에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하고 경기회복에 따라 재정적자폭을 줄여나가되 2004년에는 균형재정을 달성하기로 했다. 2000년 세계경제는 3%대, 아시아는 5.7%, 우리나라는 6%대의 고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주요 국제기구들이 전망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미국과 서유럽·일본 등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내년 세계무역이 6~7%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1999년의 4%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금액으로 치면 8~9% 정도 늘어난 수치다. ADB는 특히 한국이 아시아경제의 회복세를 주도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1998년 5.8% 성장에 그쳤지만 1999년은 9.0%, 2000년에는 6.0%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경제연구소(EIU)는 최근 발간한 '2000년 대예측' 보고서에서 내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6.1%에 달하고 물가상승률은 2.7%에 머물 것으로 내다봤다. 또 내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회원국들은 평균 3%, 개발도상국들은 4%의 기록해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건전한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예측했다.EIU는 특히 내년 우리나라 GDP는 총 4,277억 달러, 1인당 GDP는 9,040달러에 이르고 실업률은 올해 7%에서 내년 6.8%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이 연구소는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은 정부가 구조조정의 고삐를 늦추도록 할 염려가 있다고 경고했다[16].

정권 교체

IMF 사태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가져올 정도로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고, 기존의 사회 관념들이 한꺼번에 바뀌게 되었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불러일으킨 책임으로 사임했던 강경식 재정경제부 장관은 '환란 사건'의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집권 여당이었던 신한국당(現 새누리당)의 후보 이회창은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現 새정치민주연합)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패배했다.

독점 재벌의 해체

1996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건영빌라를 대량으로 건설한데서 얻은 방만한 자금관리에 시화지구 미분양까지 겹쳐 우성과 건영이 도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시작일 뿐이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한 해 동안 한보철강 (現 현대제철), 삼미그룹진로그룹대농그룹삼립식품한신공영기아그룹쌍방울그룹태일정밀해태그룹뉴코아수산중공업한라그룹고려증권청구그룹극동건설나산그룹거평그룹한일그룹쌍용그룹동아그룹고합그룹아남그룹신호그룹우방그룹새한그룹강원산업큐닉스컴퓨터신원그룹미주그룹등 대부분의 재벌 대기업들이 도산하였으며 이외에도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법정관리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98년 6월 18일에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이 이찬우 상업은행장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가져 55개 기업 청산, 매각 방침을 발표하였다. 1999년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 금융을 이용한 기업 확장이 원인이 되어 부채가 65조로 엄청나게 불어나 IMF 구제금융 사건 이후 정부의 엄청난 국고 지출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었다.
2000년에는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과 유동성 위기로 현대자동차현대백화점현대중공업현대해상현대산업개발현대건설현대전자(現 SK하이닉스) 등으로 계열분리를 하였다. 은행들은 대규모 인수 합병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도중 많은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 헐값에 매각되는 등 국부의 유출이 심각하였다.
1998년 7월 1일,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하였고, 남해화학대한교과서(現 미래엔), 한국종합기술금융(現 KTB네트워크), 대한송유관공사포항제철(現 포스코), 한국종합화학(現 케이씨), 한국중공업(現 두산중공업), 한국통신공사(現 KT), 한국담배인삼공사(現 KT&G) 총 9개 공기업이 민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인천국제공항 등의 공기업 민영화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삼성그룹LG그룹, 선경그룹(현 SK그룹), 현대그룹롯데그룹한화그룹한진그룹동양그룹대림그룹효성그룹동국제강코오롱그룹두산그룹대상그룹한솔그룹금호아시아나그룹동부그룹, 제일제당그룹(현 CJ그룹), 웅진그룹교보그룹동원그룹아주그룹과 같이 일부 재벌들은 위기를 교훈으로 삼아 IMF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해고 규제 완화

 비정규직 문서도 참고하십시오.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고용시장에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어,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었고 평생고용제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대신 평생직업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급여에서도 호봉 개념 연공서열 대신 연봉제로 바뀌었고, 또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정부의 기업정책 변화

김대중 정권은 경기 부양을 위해 건설 지원과 카드 사용 대금의 연말정산 환급 등의 소비 촉진 정책을 실시하여 경기 부양에 성공하고 2001년 8월 23일한국은행의 차입금으로,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의 관리체제에서 일찍 벗어났다. 하지만 이 소비 촉진 정책은 카드빚에 의한 신용불량자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이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내수부진의 원인이 되었다.
IMF 환란이 대기업 육성정책에 의한 일부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 때문이라는 분석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는 등 재벌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정부는 대기업 육성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시작하여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많은 벤처기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국민 의식 변화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는 아주 어려웠지만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일치·단결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과거의 무사안일주의가 타파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공공재 영리화 문제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수자원공사, 한국전력, 가스공사 등의 방만 경영으로 전기, 가스, 수도, 철도, 의료 등 공공재에 대한 민영화가 강제적으로 추진되었다. 하지만 일부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IMF는 약 10년의 유예기간을 주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유예 종료일이 다가옴에 따라 재추진하려했으나 국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인해 또 다시 유예되었고 IMF는 어쩔 수 없이 약 8년의 유예 기간을 주었다. 유예 기간이 종료되어가는 지금, 박근혜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 중이다.

국방사업의 지연

1980년대 중반부터 정확히는 1986년부터 1989년에 이르기까지 3저 호황이라고 해서 경제 성장과 수출 증가를 거치면서 전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중산층의 비중이 두터워졌으며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 경제성장을 하면서 당시 한국경제는 단군 이래 최전성기기라고 할 정도로 비유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이 되면서 가장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됐고 사회발전이 순조로웠고 실업률은 낮고 물가는 낮았다. 경제가 꾸준히 하늘 높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서민들의 장래에 대한 낙관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높았으며 한국사회가 선진국에 진입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점으로 1990년대 한국군은 한국의 달라진 경제력에 걸맞고 타 국가의 대응할 수 있을만한 국방력을 건설할 신무기 도입 사업 및 현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육군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육군은 미국과 협력하여 3세대 전차인 K-1 전차를 1987년부터 실전배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이 되면 3세대 전차를 1000여대 이상을 실전배치하게 되었다. 게다가 K200 장갑차나 K-55 자주포도 양산이 한창 진행중이었으며 K-9 자주포, K1 전차를 개량한 K1A1 전차 등은 개발 중이었고 1990년대에 AH-X 사업으로 AH-1 코브라 공격헬기를 대체할 차기 공격헬기를 구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의 영향은 AH-X 사업이 지연되어 AH-64E 아파치 가디언을 도입한 것은 2010년대에 확정되어 그 결과 2018년 현재 AH-1S/F와 함께 AH-64E를 운용하고 있다.[18] 하지만 1990년대 시기를 기준으로 가장 현대화가 필요한 것은 육군이 아닌 공군과 해군이었다.
그러나 1997년의 외환위기는 각종 국방력 증대 사업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일이 많았다. 실제로 2001년 기사에서는 "육군 AH-X 사업과 해군 KDX-3 등의 사업들은 모두 각 군의 대표적인 숙원사업들로 97년 외환위기로 미뤄졌던 것. 특히 지난해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가 급진전하면서 자칫 시작하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강하게 일면서 각 군의 치열한 로비전이 전개됐다."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19]
공군의 경우에는 현대화 계획으로 1991년에 KFP 사업으로 선정된 F-16 Block 52 면허생산에 이어서 진행될 원래의 한국군 계획은 1990년대 1차 FX로 F-15 전투기(정확히는 차기 전투기) 120대 도입으로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고 조기경보기 사업도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1 ~ 2차 FX사업으로 60대를 나누어서 도입하고 3차 FX 사업으로 F-35 40대(+추가 도입 옵션 20대)의 결과로 나오게 되면서 FX 사업이 길어지고 또한 조기경보기도 1990년대 도입에 관심을 보였으나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서 사업이 무기한 유보되었다가, 2002년에 사업이 재개되었고 더 시간이 흘러서 2010년대가 되면서 E-737 피스아이가 도입되었다.[20]
해군의 경우에는 1990년대 초에 대한민국은 이미 조선산업 규모에서 세계 1위를 달성했다. 군함도 나름의 체계를 갖춘 울산급을 건조하는 기술 역량을 지녔다. 그러나 해군은 울산급 등의 기존 체계를 운용했으며 미사일 중심의 선진적인 전투체계, 네트워크 능력은 갖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원양능력과 동시에 현대적 전투능력을 갖춘 함선 건조 기술을 획득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그것이 KDX-1 계획으로 KDX-1 광개토대왕급 사업은 우리나라의 구축함 사업의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한국 해군의 강화를 꾀하는 시작점으로 1998년에 취역했다. 하지만 KDX-1은 운용 이전에도 대양환경에 적합하지 않으리라는 지적이 있었고, 실제로 림팩훈련 등에서 한계를 느껴 3천 톤급은 대양함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KDX-1 사업은 3척에서 종결하고 운용 경험을 토대로 1996년부터 KDX-2 충무공이순신급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IMF 사태로 KDX-2 사업이 위험했지만 2001년 1월부터 건조사업을 시작하고 02년 5월에 초도함을 진수한다. 광개토대왕급의 노하우와 기술을 살려 빠른 시간에 향상된 성능으로 건조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독도함은 2002년 10월 건조 개시, 2005년 7월 12일 진수, 2007년 7월 3일 취역했다.
KDX-3로 2007년에 세종대왕급이 진수되었는데 원래 계획으로는 이지스함 6척을 배치할 계획이었으나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일단 3척만 진수되었으며 2020년대 이후에 추가로 진수될 예정이다.[21]
게다가 2010년대가 되면서 울산급, 포항급을 대체할 인천급, 대구급 등의 신형 호위함 등을 진수하고 있다.
그 결과 IMF 구제금융 요청의 영향으로 조기경보기 등의 지원 전력을 제외하더라도 2018년을 기준으로 F-15 전투기만 비교해도 미국이 450대, 일본이 200대, 대한민국이 59대를 운용하고 있다.
이지스함으로 비교하자면 미국이 90척(줌왈트급 3척, 알레이버크급 65척, 타이콘데로가급 22척), 일본 8척(공고급 4척, 아타고급 2척, 마야급 2척)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3척(세종대왕급)만을 운용 중이며 2020년대가 되서 추가로 3척을 진수할 예정이다.
그 결과 1997년의 외환위기는 국방력의 증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95년 2000년 it버블붕괴

닷컴 버블(dot-com bubble)은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면서 산업 국가의 주식 시장이 지분 가격의 급속한 상승을 본 1995년부터 2000년에 걸친 거품 경제 현상이다. IT 버블TMT 버블인터넷 버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시기는 흔히 닷컴 기업이라 불리는 인터넷 기반 기업이 설립되던 시기였으며 많은 경우에 실패로 끝났다.

2000년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세계 경제가 가장 주목하는 부문은 인터넷의 대두였다. 앉아서 뉴스와 영화, 책을 보고 대화소통이 가능했던 꿈의 통신망이 대중화되자 너도나도 이 분야의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제일 큰 인터넷 사업자였던 AOL의 주가는 당시 기준으로 1000억불이 넘는 엄청난 숫자를 기록하였고 인터넷을 대표하는 AOL과 기존의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세계적이었던 미디어 그룹 타임워너와의 합병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IT 관련 벤처기업이나 기존 IT 기업들의 주가는 폭등한다. 그러나 AOL는 곧이어 바로 주저앉아버리고 만다. 비싼 요금과 저질스러운 인터넷 서비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등을 돌리게 되었고 AOL 타임워너의 합병효과는 흐지부지하게 되고야 말았다. 그와 동시에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하였고 수많은 벤처기업들 역시 파산하게 되고 만다. 이 외에도 수많은 IT기업들이 시도했던 인터넷 서비스들이 과도기적인 인터넷 기술에 너무 많은 것을 융합하려다 보니 너무 시대를 앞서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실험이 되었다.

 

 

2001년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난 것이 미국 주식시장 개장 전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긴급히 1주일동안 주식 시장을 열지 않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67] 그러나 테러 장면이 여과 없이 생중계로 전 세계에 전파되면서, 세계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폭삭 무너져버렸다.

안 그래도 IT버블 붕괴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코스피 시장과 버블 붕괴로 인해 이미 아작나버린 코스닥 시장은 "종목 89.7%[68]가 하한가, 종목 98%[69]가 하락"이라는 진기록[70]을 세우며 폭락했다.[71]

어쨌거나 한국증시와 일본증시가 폭락하자, 인도증시, 중동증시 등이 싹쓸이로 폭락하고, 결국 유럽증시까지 싸그리 폭락하는 등 도미노 폭락 사태가 1주일 간 지속되었다.

일주일 후, 미국 증시가 다시 열리자마자 크게 하락하였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월드컵이라든가 이라크 전쟁[72]이 터지면서 세계 증시는 상승 추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결국 이런 사건이…

 

 

2007년 2008년 금융위기 (서브프라임 모기지)

다우지수 급락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2000년대 후반 미국의 금융 시장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파급 된 대규모의 금융 위기 사태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1929년의 경제 대공황에 버금가는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2007년에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사태는 미국의 TOP 10에 드는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가 파산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만이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 신용경색을 불러왔다.

2007년편집

2007년 4월 - 미국 2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회사인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파산신청을 하였다.

2007년 8월 - 미국 10위권인 아메리칸 홈 모기지 인베스트먼트(AHMI)사가 델라웨어주 웰밍턴 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였다. AHMI는 알트-A 등급(프라임과 서브프라임의 중간 등급) 모기지가 전문인 업체이다.

세계 3위 은행인 HSBC는 미국 주택시장에 뛰어 들었다가 107억 달러(약 10조 1,000억 원)를 회수 못할 위기에 놓였다.

미국 보험사인 CAN 파이낸셜이 서브프라임 투자로 9,100만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AIG는 최악의 경우 23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미국의 대출회사들이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 최근 수년간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한 대출을 늘려왔다면서, 부동산 서브프라임 위기가 자동차 서브프라임 위기로 확산될 수 있다고 보고서를 발표했다.

산은경제연구소, 삼성경제연구소 등 한국의 일부 경제관련단체에서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미국 가계소비 위축에 따른 미국 경기의 급격한 침체로 이어질 경우, 한국내 금융시장 충격과 대미수출도 지장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GDP의 20%를 차지하는 매우 큰 경제시장이다.

2007년 8월 9일 프랑스 최대은행 BNP 파리바은행은 자사의 3개 자산유동화증권(ABS)펀드에 대한 자산가치 평가 및 환매를 일시 중단했다. 서브프라임 부실로 인한 신용경색의 그 이유이다. 상환을 중단한 3개 펀드는 BNP파리바 ABS유리보, 파베스트 다이나믹ABS, BNP파리바ABS에오니아 등이고, 그 규모는 27억 5천만 유로에 달한다.

GM은 산하 모기지 금융기관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디폴트로 약 10억 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2008년편집

2008년 7월 16일 - 일본의 은행 보험사들이 패니매이, 프레디맥 채권 보유분은 9조엔 정도가 된다고 알려졌다

2008년 9월 6일 - 미국 재무부는 주택시장 침체와 모기지 손실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양대 국책 모기지업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국유화하고, 양사에 각각 1000억 달러씩, 총 2000억달러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 두회사는 미국 전체 모기지 채권의 절반을 발행하고 있다.

2008년 9월 15일 - 미국의 투자은행(IB)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 신청을 했다. 미국 정부는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국유화하고 1주일 뒤에 리먼 브러더스를 파산시키기로 결정했다.

2008년 10월 20일 -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제출한 국정감사에 제출한 답변자료에서, 한국은행은 1970년대 후반부터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투자해 왔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은 380억 달러어치의 채권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중앙정부는 1조 달러 이상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채권은 미국 국채는 아니지만,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채권이다.

2008년 10월 30일 - 한국은행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300억달러 상당의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1]

현재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보험업체는 중국의 차이나라이프이다.

2008년 11월 23일 - 미국 정부는 씨티그룹에 3000억 달러를 보증하고, 450억 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씨티그룹은 시가총액 7천억 달러(약 700조원)의 세계 최대 은행이었다.(2008년 10월 31일 현재 대한민국 전체 상장기업의 시가총액은 550조 원) 그러나 부동산 모기지 투자 부실로 주가가 급락했다. 2008년 11월 24일, 지난 한주에만 60% 주가가 폭락하였고, 시가총액은 205억 달러로 미국 5위의 은행이 되었다.

2008년 11월 27일 - 미국 정부는 이번 금융위기를 진화하기 위해 이미 7조 달러(1경 500조원)를 넘게 투입했다* 2008년 12월 10일 - 미국 하원은 미국 자동차 빅3인 GM포드크라이슬러에 대해 140억달러(약 19조2100억원)를 지원하는 대신 대통령이 임명하는 관재인(일명 ‘자동차 차르’)이 업계 구조조정을 관할한다는 법률안을 237 대 170으로 통과시켰다. 빅3는 이미 250억 달러를 저리에 대출받았었다.

2008년 12월 11일 - 미국 상원은 GM포드크라이슬러에 대한 지원 법률안을 찬성 52표, 반대 35표로 부결했다. 제2의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올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2008년 11월 28일 - 일본의 국제 금융 전문가 쓰루미 마사요시 호세이대 교수는 한국중국일본이 경제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12월 12일 - 한국은행은 중국인민은행과 1800억위안(260억달러 상당)의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기존 40억달러에서 300억달러로 확대한 것이다. 또한 한국은행은 일본은행과의 통화 스와프 규모를 기존 130억달러에서 300억달러로 확대하는 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2008년 12월 13일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는 "중국이 다른 나라와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중국, 일본은 세계 외환보유고 1위, 2위 국가이다* 2008년 12월 13일 -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제1회 한중일 서밋 정상회담이 열렸다. 매년 정기적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다. 중국과 일본 정상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자유 무역 협정(FTA)을 요구했다.

2009년편집

씨티그룹은 2009년까지 전체 인력의 20%가량인 7만5천명을 줄이기로 했다.

2009년 1월 28일 - 아이슬란드 연립 정부가 붕괴되었다.

2009년 2월 10일 미 정부, 금융안정정책 발표

영향편집

G-20 회의가 장관급에서 정상급으로 확대 개편된 계기가 되었다.


 

Posted by 블로그하는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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